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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커피명상록
엘리엇의 시 <J. 알프레드 프루프록의 연가> 중에서
2013.03.29 14:11:32 210

“For I have known them all already, known them all:
Have known the evenings, mornings, afternoons,
I have measured out my life with
coffee spoons;
 
I know the voices dying with a dying fall
Beneath the music from a farther room. [Opus 130, No. 2]
So how should I presume? ”
 
(나는 이미 그 것들을 다 알고 있다. 다 알고 있다.
저녁과 아침과 오후를 알고 있다.
나는 내 일생을
커피 스푼으로 되질해 왔다.
 
저쪽 어느 방에서 나는 베토벤 작품번호 130의 2번
음악에 섞여 갑자기 낮아지며 사라지는 목소리들도
나는 안다. 그러니 어떻게 내가 감히 해 볼 것인가?)

 
노벨문학상(1948년)을 수상한 T. S. 엘리엇
(Thomas Stearns Eliot, 1888~1965년)이
22세때 쓴 시 ‘알프레드 프루프록의 연가
(The Love Song of J. Alfred Prufrock)’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총 139행의 시 중 49~54행에 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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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_S__Eliot,_1923_출처_위키백과

 

‘사랑의 노래’라고 하기엔 밝고 기쁘고 행복한 느낌이
없어서 인지 연가(戀歌)로 번역됩니다.
 
'Love'라는 단어도 139행의 긴 이 시의 전문 어디에도
나오지 않고 오직 제목에만 있습니다.

 

프루프록은 특정인을 지칭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 식으로 치며 ‘무명씨’입니다.
철수나 영희 정도. 다만 어린이가 아니라
중년의 남성일 수 있고 여성일 수 있습니다.

 

물론, 작품의 내용과 연관지어 프록코트(froak coat)를
입은 신중함(prudence)이라고 해서 ‘프록코트를 입은
신사처럼 예절과 체면에 휩싸여 신중하게 행동하는 사람’
으로 풀이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어쨌든, 프루프록은 방황하는 현대의 중년, 이성과 감정을
적절히 조화시키지 못하여 고뇌하는 인물입니다.
이 시는 그의 활동초기 작품으로 영국 형이상학 시와
프랑스 상징주의 시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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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_인포피디아

 

시는 현대 문명의 퇴폐성을 그리고 있습니다.
커피에 대한 비유가 대부분 좋은 것인데,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것은 다행히(?)
커피가 아니라 커피 스푼입니다.

 

보잘 것이 작은 커피스푼으로 지나온 인생을 재는 행위는
얼마나 한가하고 무의미한 것일까요. 엘리엇은 단조로운
삶과 프루프록의 존재감, 낭비된 인생을 커피 스푼이라는
 상관물을 사용해 비유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커피 스푼을 들고 있는 순간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요?
스푼으로 커피를 젓는 시간은, 엘리엇이 발견한 데로 참 무료하며
의미없는, 마치 조건반사 같은 순간이 아닐까요?


하지만 실망하지 마세요. 정신을 놓을 수 없을 지경으로 바삐
살아가야 뒤처지지 않는 각박한 세상에 커피를 만나 무념무상의
순간을 경험하는 것도 커피가 주는 축복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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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_S_Eliot_Simon_Fieldhouse 출처_위키백과

 

 

박영순(큐그레이더, 이탈리아에스프레소 스페셜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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