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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비평/ 칼럼
모호한 향미 단어와 명료한 색
  • 향미에 어울리는 색을 띄워주는 한 잔의 커피
2022.01.26 21:41:41 177

변화와 차이를 감각적으로 보다 명료하게 보여주는 것이 색이다. 커피마다 달리 지니고 있는 다양한 맛을 향미 용어(flavor terminology)만으로 차별적이게 묘사하기란 쉽지 않다. 커피를 마시고 “은은한 꽃 향기에 과일 맛이 나고 너티(nutty)하다”고 표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품질이 일정 수준 이상인 커피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향미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 사람 어때요?”라는 물음에 “한국사람이에요”라고 답하는 것과 같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보다 자세히 알기 위해선, “말투를 보니 충청도 출신이고 말하는 모양새가 교양을 쌓은 분 같은데, 울퉁불퉁 근육을 봐서 운동을 한 분 같다”는 식으로 몇 가지 범주(category)에 따른 풀이가 필요하다. 범주는 다시 속성(attribute)으로 세밀하게 분류된다. 말투가 충청도라고 하더라도 억양이나 사용하는 상투어를 보니 충북보다는 충남, 그중에서도 서천 분인 것 같다고 범위를 좁혀 갈 수 있다.

커피 향미 표현에서 ‘과일(fruity)’이라는 범주는 베리(berry)-건과류(dried fruit)-시트러스계열(citrus fruit)-기타 과일(other fruit) 등 4개의 하위 범주(sub category)로 나뉜다. 과일에서만 이들 하위 범주는 다시 블랙베리, 라즈베리, 블루베리, 딸기 등 18개의 속성으로 나뉜다. 커피에서 과일 맛이 난다고 하면, 구체적으로 18개 속성 가운데 어디에 해당하는지를 밝혀야 각자가 느끼는 관능을 보다 면밀하게 전달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커피가 지닌 성격을 차별적으로 묘사할 수 있는 것이다.

커피는 지구촌을 대표하는 음료로서 수천만명의 생계가 달린 거대한 비즈니스가 됐다. 이제 커피 향미를 묘사하는 것은 문학과 예술, 교양과 낭만의 영역에 그치지 않는다. 커피 향미는 판관 포청천의 개작두처럼 얄팍한 상술을 처단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한 잔의 커피는 사과처럼 원재료를 보거나 만질 수 없다. 파는 사람들에게 좋은 커피이냐고 물어선 진실을 구하기 힘들다.

소비자들로서 나쁜 커피를 가려내는 것은 결국 맛밖에 없다. 세계 도처에서 나오는 커피를 품질에 따라 분류해 제 값을 치르는 풍토를 조성하고, 재배자들로 하여금 좋은 향미를 추구하도록 이끌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커피 테이스터스 플레이버 휠(Coffee Taster’s Flavor Wheel)’이다. 2015년 UC데이비스, 캔자스주립대, 텍사스A&M대학교 등 연구자들과 70여명의 커피전문가들이 좋은 커피에서 나오는 속성들을 뽑아 세계적으로 같은 단어를 사용하도록 이른바 ‘커피 향미 공용어집’을 만들고 이를 시각화한 것이다.

플레이버 휠에는 커피에서 감지되는 99가지 향미적 특성들이 배치돼 있는데, 유심히 봐야 할 것이 색이다. 파고들수록 경계가 모호해지는 향미 단어들을 감각적으로 쉽게 구별하도록 하는 것이 색이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묘한 맛을 느꼈을 때, 우리는 반사적으로 “색다른 맛이네”라고 외친다. 맛과 색을 연결 짓는 본능은 자연 속에서 이뤄낸 진화의 산물이다. 꽃이 붉은색, 채소가 녹색, 발효 맛이 노란색으로 표현된 것은 그 속성을 나타내는 물질들이 자연에서 그 색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커피를 마시면 지그시 눈을 감고 우리의 본능이 향미에 어울리는 색을 피워내 주기를 기다린다. 색을 쫓아 추억 속의 한 장면으로 가면 그곳에 커피를 말할 수 있는 속성들이 놓여 있다.

스페셜티커피협회(SCA)가 좋은 커피에서 감지되는 속성들을 모아 시각화한 ‘커피 테이스터스 플레이버 휠(Coffee Taster’s Flavor Wheel)’, 색은 자연에서 그 속성들을 대표하는 색으로 선택됐다.
SOURCE: http://www.segye.com/newsView/20211103520496?OutUrl=daum

박영순 I 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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