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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비평/ 칼럼
시가향 나는 커피, 좋은가 나쁜가
  • 로스팅 과정에서 형성되는 '후천적 속성'
2021.11.15 09:12:04 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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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로스팅 과정에서 건류반응으로 인해 묵직하면서도 향신료처럼 복합미가 느껴지는 향미가 형성된다. 시가향이 대표적인 속성이다. 사진은 하와이 코나의 한 농장에서 커피를 볶아 배출하는 모습. 커피비평가협회(CCA) 제공


커피에서 시가(Cigar)의 느낌이 난다고 하면 좋다는 말일까, 나쁘다는 말일까?
와인애호가들 사이에서 시가향은 오크통에서 오래 숙성된 고급 와인이 지니는 대표적 속성 중 하나로 꼽힌다. 내부를 불로 그을린 참나무통에서 와인은 감미로움을 주는 바닐린과 연기를 연상케 하는 페놀 성분들을 얻어 복합미를 지니게 된다.

여기에 포도가 지닌 식물체의 생동감이 어우러지면서, 색감으로는 다크 그린이나 다크 브라운을 떠올리게 하는 강인한 면모도 지니게 된다. 탄닌이 강한 품종인 카베르네 소비뇽으로 빚어 오크통에서 장기간 숙성하는 보르도 메독(Medoc)와인의 대표적인 매력이 시가향이다. 특히 마고(Margaux), 라투르(Latour), 라피드 로칠드(Lafite Rothschild), 오 브리옹(Haut-Brion) 등 그랑 크루(Grand Cru)와인이 오크통 숙성을 거치며 갖추게 되는 부케(Bouquet) 중 으뜸으로 꼽는 게 시가향과 가죽향이다. 

보이차도 덖고 퇴적해 후발효하는 과정에서 그윽하면서도 독특한 자극을 주는 시가의 뉘앙스를 갖게 된다. 토탄(Peat)을 태워 맥아를 건조시키는 스카치위스키와 과일을 첨가해 숙성하는 벨기에 에일 맥주에서도 시가향은 고급스런 생동감을 부여하는 오브제이다.

커피에서 시가는 고급스러운 향미를 나타내는 묘사어로 자주 쓰인다. 커피는 즙을 발효해 만드는 와인과 달리 섭씨 200도를 넘나드는 고온에서 볶는데, 이때 시가의 느낌을 얻게 된다. 따라서 커피에게 시가향은 본성의 면모라기보다는 로스팅을 통해 형성되는 ‘후천적 속성’인 것이다. 

와인전문가인 프랑스의 장 르누아르는 “커피에서 감지되는 잎담배향은 마른 채소와 구운 향의 조합이다”고 정의했다. 그는 1997년 르네뒤카페라는 36종의 커피아로마키트를 만들면서, “시가향이 나는 커피는 가을에 마른 낙엽 아래에서 탁탁 튀기는 불길을 떠올리게 한다”고 비유했다. 이 대목은 우리에게 이효석 선생의 수필 ‘낙엽을 태우면서’(1938년 발표)를 떠오르게 한다. 소문난 커피애호가였던 선생은 낙엽 타는 냄새가 갓 볶아 낸 커피처럼 기분을 좋게 한다고 묘사했다.

시가향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묵은 재떨이’나 담배꽁초를 더 올리며 진저리를 친다. 볶은 지 오래돼 산패된 커피들이 풍기는 담배냄새를 시가향이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그런 경우라면 차라리 “악취가 난다”고 하면서 커피를 물리면 된다. 1970년대 국내에서는 커피가 사치품으로 지정돼 귀하고 매우 비쌌다. 이로 인해 일부 다방이 재료를 아끼기 위해 담배꽁초의 필터만 가려내 삶은 물을 커피에 섞거나 커피 찌꺼기에다 톱밥과 콩가루, 계란껍질 등을 섞어 가짜 커피를 만들어 팔기도 했다. 커피한국사에 이 사건은 ‘꽁피사건’, 또는 ‘담배꽁초커피 사건’으로 기록됐다.

‘시가’는 담뱃잎을 통째로 돌돌 말아 만든다. 중심과 중간, 겉을 싸는 잎을 무엇으로 하느냐에 따라 향미가 달라진다. 어떤 첨가물도 없으며, 포장된 상태에서도 커피처럼 발효와 숙성이 진행된다. 따라서 시가에서도 커피향이 난다는 묘사를 한다. 근본과 거쳐온 길이 비슷하니 서로에게서 면모가 감지된다. 커피 향을 느낀다는 것은 만물의 공감을 찾아가는 희열의 길이 아닐 수 없다.

시가향 나는 커피, 좋은가 나쁜가 [박영순의 커피 언어] - 세계일보 (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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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순 | 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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