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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사이언스
정말 커피 때문에 속이 쓰릴까?
2019.10.30 10:41:07 124

“빈속에 커피를 마시는 것은 좋지 않다”는 통념은 커피애호가들에게 적잖은 불편함을 준다.
공복에 마시는 커피가 치명적일 수 있다는 보도까지 나올 때면, “빈속에 먹어 좋지 않은 게 비단 커피뿐이냐”는 항변을 쏟아낸다.

사실 공복에 먹지 말라고 하는 음식물을 보면 상식을 깨는 게 한둘이 아니다.
바나나도 그 중에 하나다. 바나나에는 마그네슘이 많이 들어 있어 빈속에 먹으면
혈액에서 칼륨과 이루는 균형이 깨져 심장박동에 이상이 생긴다는 경고가 있다.

토마토는 펙틴 성분이 위산과 격렬한 반응을 거쳐 덩어리로 변해 위장을 막을 수 있다.

귤은 함유된 유기산과 당분이 위 점막을 자극해 통증을 유발하고,
고구마는 아교질과 타닌 성분이 위산 분비를 촉발시켜 속을 쓰리게 한다는
질책을 받는다. 심지어 찬물까지 위장을 자극해 공복에 좋지 않은 음료로 꼽힌다.

위장을 자극하는 커피의 성분으로 주로 지적을 받는 것은 카페인과 지방산이다.
카페인에 대해선 식도와 위장이 연결되는 부분에서 밸브로 작동하는 기능을
느슨하게 함으로써 위산의 역류를 허용할 수 있다는 경계령이 내려져 있다.

지방산은 산도 자체가 위장에 자극적이며, 이 때문에 카페인이 없는 커피라도
빈속에서 위산과 함께 소화관을 손상시키는 주범으로 몰린다.
커피는 또한 급격한 대장 운동을 촉진해 복통을 동반한 과민성 대장질환을 유발하는 것으로 보고되기도 했다.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공복 상태에서 음식물이 항상 위산 분비만을 촉발하는 게
아니라 산성에 대해서는 중화하는 작용을 한다” “소화를 돕는 위산은 음식 냄새만 맡아도,
심지어는 음식만 떠올려도 분비되는데, 커피가 유독 해로운 것처럼 말하는 것은 편견이다”
“커피는 ‘악마의 키스’에 비유되는 검은 빛깔 때문에 건강에 끼치는 영향이 부정적인 쪽으로 과장됐다”는 등의 주장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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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에 대한 애정 때문에 의학적 경고를 무시해선 안 된다.
카페인은 분명 위산 분비량을 정상적인 것도 늘어나게 만들어 위궤양이나 위염을 조장할 위험이 있다.

지방산으로 인한 위통도 엄연한 사실이다. 위산 분비의 균형이 깨져 속 쓰림이 심해지면
역류성식도염 증상이 악화되고, 여기에 카페인이 지속적으로 공급되면 속 쓰림이 강화되는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이다.

얼마 전 미국립과학원회보에 카페인이 위산 분비를 촉진하는 메커니즘을 밝힌 논문이 실렸다.
카페인이 위벽의 세포 표면에 있는 쓴맛수용체와 결합해 위산을 분비하라는 신호를 전달하는 것이다.

쓴맛수용체는 쓴맛을 감지하는 수용체로서, 인간에게는 25가지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맛 수용체가 혀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21세기 들어 맛 수용체가 위와 장, 기관지,
심지어 뇌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이 대목에서 1908년 커피 드립 추출을 고안한 독일의 멜리타 벤츠 여사가 떠오른다.
그는 선천적으로 위장이 약했지만 커피를 너무나 좋아했다. 위가 아픈 것을 참아 내며
커피를 마시던 어느 날, 아들이 잉크글씨가 번지지 않도록 종이를 덧대는 것을 보고 착안했다.

“내가 마시는 진한 커피도 종이로 살짝 거르면 좀 순해지지 않을까?”
벤츠 여사는 양철 드리퍼 위에 종이를 올려놓고 커피를 붓는 방식으로
지방산을 걸러 마심으로써 위통을 줄일 수 있었다.
벤츠 여사는 지금까지 드립 커피의 원조로 커피애호가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찬물로 성분을 추출하는 콜드브루 커피 또는 더치커피 역시 지방산을 줄임으로써
상대적으로 속을 편하게 해준다. 찬물에는 지방산이 잘 녹아 내리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에스프레소는 섭씨 95도에 육박하는 뜨거운 물에 압력까지 가하기 때문에 지방산의 추출량이 많아진다.
에스프레소의 위에 뜨는 황금색의 크레마에 지방산이 농축돼 있다.
따라서 위장 자극을 걱정하는 분이라면 아메리카노를 만들 때 종이필터에 한 번 걸러 마시는 것도 좋겠다.

 

박영순 = <이유 있는 바리스타> 저자/ 서원대 교양학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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